작성일 : 21-02-15 18:16
[[김삼웅의 인물열전] 무장독립투사 최운산 장군 평전] '미쓰야협정'으로 독립군활동 제약
 글쓴이 : 창래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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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의 인물열전] 무장독립투사 최운산 장군 평전 / 40회] 한인에게 거주 이전의 자유를 제한하고, 무기 휴대와 집회결사를 금지시켰다[김삼웅 기자] ▲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귀감이 된 최운산 장군 북만주 제1의 대지주이자 거부 최운산 장군은 자신의 전 재산을 쏟아 부어 무기구입, 군복 제작, 군량미 조달 등 독립군 기지 건설과 독립군 양성에 혼신을 다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귀감이 되는 인물이다. 1977년 뒤늦게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았다. 최진동 장군과 함께 <봉오동 전투>의 실질적 주역이다.ⓒ 최운산 장군 기념사업회 제공 길림감옥에서 만기로 출소한 최운산은 현장으로 복귀하였다. 하지만 만주의 사회 분위기는 3년 전에 비해 확연히 달라지고 있었다. 정세의 변화 탓이기는 하지만 무장전쟁론자인 그로서는 얼른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물론 만주 곳곳에는 여전히 무장전쟁만이 일제를 구축할 수 있다는 용맹한 독립군도 산재해 있었다.  중국에서는 1920년대 중후반에서 30년대 초기에 걸쳐 두 갈래의 큰 흐름이 동시적으로 전개되었다. 1928년 5월 제남(濟南)에서 중ㆍ일 양국군이 충돌하는 '제남사건'이 발발하고, 6월에는 일제가 장작림이 탄 열차를 폭파시켜 그를 사망케 하였다. 무엇보다 만주의 정세에 큰 변화를 준 것은 1925년 6월 조선총독부 미쓰야 경무국장과 중국 봉천성 경무국장이 맺은 이른바 '미쓰야(三矢) 협정'이었다. 한국독립군을 탄압하기 위해 재만 한인의 단속을 강화할 목적으로 체결된 이 협정은 한인에게 거주 이전의 자유를 제한하고, 무기 휴대와 집회결사를 금지시켰다.일제는 이에 앞서 조선에서 치안유지법을 제정한 것을 그대로 만주의 한인들에게 적용시킨 것이다. '미쓰야협정'은 일제가 재만 동포와 그곳 독립운동 세력을 얼마나 두려워했던가를 보여준다.                                      미쓰야 협정1. 중국재류의 조선인은 중국관헌에서 청향장정(淸鄕章程)에 따라 호구(戶口)를 엄중조사하며 패(牌)를 편성해서 서로 보증하며 연대책임을 지게 한다.2. 중국관헌은 각 현에 통령(通令)해서 재류선인이 무기를 휴대하고 조선에 침입하는 것을 엄금시킨다. 범하는 자는 체포해서 조선관헌에 인도해야 한다.3. 불령선인 단체를 해산하고 소유하는 총기는 수색ㆍ몰수하여 무장을 해제해야 한다.4. 조선인 소유의 총기화약(단 농민이 소유한 조수구제용 총기는 제외)은 당해 관서에서 수시 엄중수색해서 몰수한다.5. 조선관헌이 지명하는 불령단 수령을 체포해서 조선관헌에 인도해야 한다.6. 중일 양 관헌은 불령선인의 단속실황을 상호 통보해야 한다.7. 중일 양 경찰은 마음대로 월경할 수 없다. 만약 필요할 때에는 상호통보해서 대신 처리하는 방법을 청구해야 한다.8. 종전의 현안은 서로 성의를 가지고 기한을 정해서 해결해야 한다. 이상.                              중화민국 14년 6월 11일                              대정 14년 6월 11일. (주석 1) ▲  만주벌판ⓒ 박도 또 한 갈래는 급속한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확산과 세력의 확대였다. 장개석 국민정부의 부패와 일제침략에 대한 미온적인 대처가 공산주의 세력의 확대로 나타났다. 이같은 현상은 재만 한인사회로 파급되었다.  간도는 당시 50만 명의 교포가 살던 지역으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간도공산당)이 조직되어 항일 투쟁을 하고 있었다. 간도공산당사건은 1928년부터 30년까지 4차에 걸쳐 일어났다.1차사건은 당시 만주총국이 서울에서 진행중인 조선공산당사건 공판의 공개를 주장하는 격문을 배포하고 시위를 계획하다가 일제 간도영사관 경찰서에 탐지되어 29명이 검거된 사건이다. 이후 1928년 9월 2일 국제 청년일 기념 집회를 개최하려다 발각되어 70여 명이 검거되었다.(2차사건). 1929년에는 광주학생 운동이 일어나 해외에까지 영향을 미치자 만주총국도 3ㆍ1혁명 11주년을 기념하여 일제에 대한 항의운동을 하려했다. 시위의 전 단계로 2월 28일 오도구(五道溝)를 시작으로 북간도에서 일제타도와 독립만세를 외치는 농민 시위가 시작되었다. 5월 1일을 기하여 일제히 시위를 일으키려 했으나 3월 하순 일본 경찰에 탐지되어 5월 중순까지 130여 명이 검거되어 좌절되었다. (3차사건). 간도공산당 4차사건(5ㆍ30폭동)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이 해체된 뒤 중국공산당 만주성 위원회가 주도한 사건이다. (주석 2) 이와 같은 정세의 변화에 따라 만주의 독립운동 진영은 1929년 3월 정의부ㆍ참의부ㆍ신민부가 길림에서 2차 통합회의를 열고 자치기관으로 국민부(國民府)를 조직하였다. 최운산 형제도 참여하였다. 한민족의 힘을 한데 모아 독립을 쟁취하려는 움직임은 1920년대 후반부터 국내와 국외에서 일어났다. 만주 지역에서는 정의부ㆍ참의부ㆍ신민부의 통합 논의가 이루어졌다. 그 과정에서 신민부의 군정파와 정의부 일부는 혁신 의회를 조직했고. 정의부를 중심으로 신민부의 민정파와 참의부의 일부를 비롯한 민족주의 계열은 국민부로 통합했다. 국민부는 농민운동 지도, 계몽활동, 정치적 훈련을 비롯해 반일 자치운동에 노력하는 한편 친일 앞잡이에 대한 숙청도 맹렬히 진행했다.  한편 국민부를 행정부로 삼고, 이 행정부를 지도하는 민족유일당으로 조선혁명당을 조직했다. 곧 독립운동과 군사활동은 조선혁명당과 당 산하의 조선혁명군이 맡고, 국민부는 당의 지도를 받는 자치정부의 형태가 갖추어진 것이다.조선혁명당은 만주와 국내에 지부를 설치했으며, 1만여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1930년대 중반까지 활발히 활동했다. 1929년 6월의 혜산진 무력 독립 시위를 지도했으며, 1932년에는 중국의용군과 함께 일만(日滿)연합군과 정규전을 벌여 큰 전과를 거두었다. (주석 3)주석1> 일본외무성, 『일본외교연표와 주요 문서』 하.2> 하일식, 『연표와 사진으로 보는 한국사』, 297쪽, 일빛, 1998.3> 앞의 책, 199쪽.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덧붙이는 글